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저자

이인

브랜드

한겨레출판

분야

에세이>한국에세이

출간일

2021-07-23

ISBN

9791160406245

가격

16,000원


구입처

전자책

도서정보

 ”피 여사,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라고요?”

“두바이?”

 

염세주의 손자와 비관주의 할머니의 동거 일기

그 기적 같은 기쁨과 유대의 기록

 

‘백 살’ 할머니, 일흔 살 어머니, 마흔 살 손자, 모두 더하면 210살. 작가로 살던 손자는 코로나 시대를 맞아 느닷없이 ‘백 살’ 할머니 피영숙의 간병인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혼자 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보내던 그는, 할머니가 살아온 백 년의 삶, 노년의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로 기록한다.

이 책은 세상 바깥에서 살고 있다고 믿던 작가가 자신보다 작고 약한 할머니를 돌보면서 발견한 기쁨과 유대의 이야기다. 이인은 “이렇게 살 바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 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텔레비전보다는 텔레비전을 보는 피 여사를 시청”하며 할머니 피 여사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피 여사는 야생동물 다큐멘터리와 격투기 경기를 좋아했다. 앵무새를 보면 눈을 떼지 못했고,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고 또 보았다. 이인은 피 여사와 삼시세끼를 같이 먹고, 거동을 돕고, 밤마다 자세를 고쳐주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들처럼 된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이 고통은 전 세계 공통이다.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15쪽)

이인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살 바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 했다. 그 누구도 작가가 되라고 추천하지 않았고, 글을 잘 쓴다는 칭찬도 들어본 적 없으며, 대책도 없었지만, 작가가 되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머무르며 보낸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어둠 속에도 반짝임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빛에 눈멀지 않고 어둠에 눈 돌리지 않으려고 한다. 인생과 세상을 두루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지은 책으로 《고독을 건너는 방법》 《남자, 여자를 읽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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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부 할머니와 손자

우리는 모두 늙는다 | 주저앉은 피 여사 | 보행기를 끌게 되다 | 그나이에 틀니가 가당키나 하냐 | 거울 앞에서 빗질하는 노인 |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 오랜만의 외출 | 노인들은 금세 친해진다 | 인절미와 시장표 김 |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거니? | 나 안 보고 싶었어? | 전화교환원과의 갈등 | 이웃집 노인의 자식 자랑 | 텔레비전이라는 은인 | 드라마에 몰입하다 | 사자와 하이에나 | 개와 고양이 | 보고 있으면 몸이 후끈후끈해져 | 비공식 국가 대표 응원단장 | 바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것 | 은으로 만든 빗 | 층간 소음과 효녀 효자들 | 모두 각자의 노후 | 치즈에 눈을 뜨다 | 타인과 함께 먹는 법 | 암묵의 통행금지 | 비타민이 필요해 | 과일 사계절 | 골드키위와 그린키위 그리고 망고 | 최애 생선 | 연어라는 행복 | 배고프지 않으려는 인간 | 가깝지만 가장 먼 | 모녀, 해묵은 애증의 관계 | 가족끼리 잘 지내기란 | 장편소설 같은 파란만장

2부 피 여사

할머니 덕분에 살았다 | 학교에 가고 싶어서 | 일자무식에서 벗어나다 | 강제징용된 남동생 | 남자가 덩치가 있고 키가 커야지 | 예쁘고 아름다운 새색시 | 행복과 고통의 총량 | 연이은 조카들의 죽음 | 콩가루 시댁을 향한 원망 | 모난 성격은 모진 세월의 반영 | 똑똑지 못한 빨갱이 | 미우나 고우나 하나였던 | 이북 남자의 편지 공세 | 니가 도망가면 일본을 가겠냐 중국을 가겠냐 | 온전치 못한 환대 |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이 | 밑도 끝도 없는 폭력 | 승냥이를 피해 호랑이 굴로 | 눈 좀 밝게 해주세요 |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뼈가 붙었다 | 사돈어른과의 어색한 오후 | 사라진 손자 | 헐벗은 가슴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 미래를 향해 쏜 화살 |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불화가 필수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 피 여사의 자식들 | 셋째 아들과 막내아들 | 내 처지가 지옥 같더라도

3부 가족

이유를 따지자면 핏줄 | 가족이라는 울타리 | 시커멓게 캄캄한 밤 |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려면 | 나이가 들수록 비보는 늘어난다 | 인간은 받은 걸 결코 잊지 않는다 | 단출한 장례식 | 미움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기를 | 엄마가 처음이라 | 말없이 눕다 | 어머니, 나 좀 데려가요 | 들리지 않는 신음과 절규 | 미장원에 가자 |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 전염되는 우울 | 마음에 드리운 장마전선 |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엉엉 | 오랜 병에 효자 없다 | 도둑맞은 하루 | 수렁으로 빠져들다 | 뼈만 남은 엉덩이 | 현실도피 | 백 세까지 살기를 바랐지만 | 심야의 불침번 | 악마의 히죽임 |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요하게 | 내가 언제 자는 거 봤냐 | 아기가 된 할머니 | 고통을 마주하는 힘 | 스스로 매듭짓는 일 | 내가 없는 날 | 지금 행복해요? | 내가 죽길 고사 지내는 거냐 | 코알라와 두바이 |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긴 지켜봄이 담담한 이해에 닿는 순간
사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

피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인은 피 여사를 보살피며 한때 자신을 기른 한 여성의 삶을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글로 적는다. 작가는 한 여성이 살아온 백 년의 삶을 듣고 기록한다.
피 여사의 삶은, 가난한 여성이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기록이다. 피 여사는 1925년에 태어나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십 대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자 스무 살에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마약쟁이였고, 한 집에 첩을 두었고, 한국전쟁 때 학살당했다. 피 여사는 두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피 여사는 세 아이를 더 낳고 비참한 삶을 견뎠다.

어느 날, 피 여사가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여명의 새벽녘에 아흔을 넘긴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피 여사는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피 여사의 주변으로 슬픔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글픔과 서러움으로 뒤엉킨 어둠이었다. 어둠을 걷어내려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건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피 여사가 충분히 울도록 그저 바라보았다. (49쪽)

피 여사도 한때는 직접 거동하며 자식과 손자를 돌보았다. 하지만 피 여사는 삶을 혼자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이 침침해졌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잇몸에서 피가 나고, 이가 시렸으며, 밥 먹을 때는 입이 말라 음식이 영 까끌까끌했지만 잘 때는 침을 흘렸다. 골다공증이 생겼고, 근력이 약해졌고, 소화가 안 됐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고, 변비에 걸렸고, 요실금에 시달렸고, 오십견이 생겼다. 허리를 삐끗했고, 무릎에 염증이 찼고, 삭신이 쑤셨고, 팔이 저렸고, 목이 욱신거렸고, 호흡이 가빠왔고, 검버섯이 생겼고, 심장이 안 좋아졌다.
일흔 살 딸과 마흔 살 손자는 피 여사의 하루에 삶을 맞추기 시작한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피 여사를 위해 성인용 기저귀를 구입하고 외출은 한 번에 한 사람만 했다. 어느 날부터 손자는 피 여사가 낮잠을 자지 않고 밤에 푹 잘 수 있도록 몰래 두유에 커피를 타 넣고 낮에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피 여사와 함께 사는 법을 익혀 나갔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병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보루네오."
뜬금없이 피 여사는 보루네오라고 답했다. 과거에 각인된 가구 브랜드 보루네오가 코로나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으면 피 여사는 스리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이름이 뭐라고요? 맞춰봐요. 코로 시작해요."
"코, 코, 코브라."
피 여사의 답에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289쪽)

손자는 할머니를 돌보며 비로소 작가가 된다. 삶을 이야기로 적는 사람이 된 것이다. 피영숙의 삶을 이해하며 작가는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한 가지 배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는, 단순하지만 놓치기 쉬운 사실.

피 여사가 밥 잘 먹고 침대에 누웠을 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뜻밖에 피 여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여사와 내가 옆에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한 말이겠으나, 피 여사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답변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295쪽)


(* 제목에 쓰인 백수는 놀고먹는 사람을 뜻하는 백수白手가 아니라 아흔아홉 살을 뜻하는 백수白壽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