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하트

저자

정아은

브랜드

한겨레출판

분야

한국소설

출간일

2022-09-20

ISBN

9791160408911

가격

13,800원

선정 및 수상

제18회 한겨레문학상


구입처

전자책

도서정보

■ 책 소개

 

“연애라는 강물이 흘러가면서 주변에 있는 회사, 가정, 사회 등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살려낸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문제적 단면이라고 할 풍경 하나가 완성되었다.” _은희경(소설가)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모던 하트》 개정판

 

익숙하면서도 쿨한 대도시,

연인과 직장의 풍속도를 생생하게 그려낸 세태소설!

 

1996년 제정된 한겨레문학상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장강명의 《표백》, 강화길의 《다른 사람》,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 김유원의 《불펜의 시간》, 강성봉의 《카지노 베이비》 등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린 작품들을 선보이며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정아은의 《모던 하트》는 2013년 당시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 통속과 품위의 경계, 훈계와 반성의 경계에서 즐거이 줄타기하는 세태소설의 모범 답안” “눈으로 읽고 있지만 귀로 들리는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252편의 경쟁작 가운데 본심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샐러리맨의 세태를 안정된 문장력으로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던 하트》는 헤드헌터로 일하고 있는 서른일곱 살 김미연의 삶을 통해 대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 연인과 직장의 풍속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미연은 학벌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아간다. 출신 대학에 따라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묵시적 차별이 회사 조직은 물론, 연애와 결혼 같은 개인의 삶과 내면까지 확고하게 지배하는 현실을 《모던 하트》는 솔직하고 세세하게 묘사한다. 또한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슈퍼맘의 고충과 그를 둘러싼 관습과 제도의 문제, 세대 간의 갈등 등을 폭넓게 보여준다. 특히 일, 연애, 결혼이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으로만 끝날 수 없는 비루한 일상을 탁월하게 묘사하며, 속도감 있게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대한민국에서 출신 대학은 낙인이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

세속적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실시간 대화록

 

《모던 하트》의 주인공 서른일곱 싱글 여성 김미연은 3년 차 헤드헌터다. 헤드헌터인 그녀 앞에는 더 높은 연봉과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줄지어 선다. 쟁쟁한 스펙과 철저한 경력 관리를 통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이들 앞에서 헤드헌터는 기꺼이 첫 심판자가 된다.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잣대는 학벌 세탁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출신 대학’이다. 아무리 그 자리에 맞는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학벌이라는 선을 넘지 못한 지원자에게는 ‘훌륭한 인재이지만 우리 회사와는 맞지 않는다’는 탈락 소식만 전달될 뿐이다. 사내 정치에 어둡고 눈치가 그리 빠르지 않은 미연에게 헤드헌터로서의 성과는 멀기만 하고, 후배로 들어오는 20대 직원들의 정보 수집력과 인맥 동원력은 그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나름대로 치열한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근성만 남은 미연에게, 로맨틱한 연애는 오래전 얘기다. 썸남과 물고기남, 실속 없는 두 남자 사이에서 긴장감 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스킨십 없이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썸남 태환. 그가 있는 곳으로 미연은 늘 달려간다. 채식을 하는 그에게 맞춰 음식을 주문하고, 그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검색해서 듣는다. 국내 제일의 사립대학 Y대를 나온 그가 미연에게 먼저 달려오는 일은 없다. 그런 그녀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대전에서 서울까지 달려오는 흐물은 지방대를 나와 공사에 다니는 하찮은 남자일 뿐이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주변 친구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데 혼자 뭔가 엄청난 것을 놓친 듯한 초조함, 대오에서 뒤처져 앞사람들을 영영 따라잡지 못하게 된 것 같은 불안감이 미연을 수시로 덮친다. 그렇다고 그 길로 선뜻 들어서기에는 결혼한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미연의 동생 세연만 봐도 그렇다. 세연은 통칭 슈퍼맘이다. 직장을 다니며 두 아이의 양육을 도맡아 하느라 일상이 전쟁이다. 그 전쟁터 아래 홀로 평온한 사람은 ‘서울대 간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사법고시생 제부. 변변한 직업 하나 없으면서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그를 볼 때마다, 미연은 분노가 치솟는다. 게다가 결혼한 동생과 친구들은 미연에게 ‘싱글이라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미연은 점점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돌보거나 그들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늘어난다. 심지어 얼굴을 한두 번 봤을 뿐인 윗집 여자의 아이까지 돌봐주다 귀한 주말이 다 지나가기도 한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미연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꿈꾸는 것은 ‘주식 대박’ ‘부동산 대박’이다. 인간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A등급’을 달지 못한 사람은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 외에는 인생에서 극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모던 하트》는 우리와 너무나 닮은 미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학벌로 번식하고 스펙으로 증식하는 인간들의 냉혹한 정글” 같은 대도시의 풍속도를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헤드헌터라는 직업의 내밀한 세계를 파헤치면서, 학벌을 따지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내 애인, 배우자를 학벌로 재단하며 평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메신저를 훔쳐보는 듯한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는 실시간 대화록처럼 귀로 들리며 속도감을 더한다. 그 대화들을 들으며 킥킥 웃다가 어느 순간 뜨끔함과 함께 씁쓸한 뒷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정아은
2013년 《모던 하트》로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등을 썼다.
1 이직의 시대
2 통하는 사람
3 윗집 여자
4 슈퍼맘과 짝퉁 용
5 미스 커뮤니케이션
6 퍼즐의 완성
7 비상용 남자
8 결혼 특별 부록
9 오뚝이 헤드헌터
10 20억짜리 꿈
11 장밋빛 인생
12 오늘도 무사히
13 진실 게임
14 공범 의식
15 세련된 인간

작가의 말
개정판 작가의 말
추천의 말
■ 추천사

헤드헌트라는 말은 멋지다. 외래어 속에 숨겨진 세세한 사정을 모르니 더 멋지게 보인다. 멋진 외래어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감추는 그럴듯한 포장지가 된다. 정아은은 이직이 생존이 되는 험난한 자본정글, 대한민국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보여준다. 직업적 은어들의 리드미컬한 배치도 신선하다. 《모던 하트》는 새롭고, 사실적이며, 뜨끔하다. _강유정(문학평론가)

늘 커피 체인점을 드나들며 수시로 아이패드로 카톡을 하거나 메신저로 대화하는 현대적 일상, 결혼과 이직을 둘러싼 평범한 샐러리맨의 욕망과 비애, 학벌주의와 계급을 둘러싼 정글 자본주의의 생태학……. 이처럼 익숙하면서도 쿨한 대도시, 연인과 직장의 풍속도를 유능한 헤드헌터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포착한 《모던 하트》에 의해 ‘한겨레문학상’의 스펙트럼은 한층 다채롭게 확장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내가 이 거대하고 슬픈 도시에서 여전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잠시 마음이 아연해졌다. _권성우(문학평론가)

어떤 무게를 지닐 것인가? 무거우면 침잠하고 가벼우면 휘발된다. 얼마나 진창에 발을 빠뜨릴 것인가? 비속하면 천해지고 고상하면 조롱당한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 가르치자면 배울 사람이 없고 자성만으론 허망하다. 현실 속의 제자리를 탐색하는 문학의 난문제에 《모던 하트》는 대답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 통속과 품위의 경계, 훈계와 반성의 경계에서 즐거이 줄타기하겠노라고. 2013년식 세태소설의 모범 답안이다. _김별아(소설가)

《모던 하트》는 모처럼 읽은 건강한 세태소설로서 내 마음에 남는다. 현실의 이면까지 체크하는 꼼꼼한 진술과 과장이나 감상에 빠지지 않는 서사, 그에 따른 견실한 문학적 관점이 장점이다. 이는 오늘의 삶을 충직하게 반영하는 소설이 많지 않은 문단의 일반적인 트렌드와 배치된다는 점에서 귀하게 읽힌다. 현재 진행형의 우리네 세태를 이만큼 가감 없이 형상화하는 일은 쉬운 듯하지만 기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_박범신(소설가)

《모던 하트》는 현재를 달리는 기차 안의 세상이다. 헤드헌터의 눈에 비친 풍경들은 목적지가 모두 다른 동승자, 소설의 가독성처럼 우린 너무 짧은 시간에 먼 곳까지 와버렸다. _백가흠(소설가)

헤드헌터의 세계를 치밀하게 그린 소설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가 얼얼한 펀치를 맞았다. 오지랖 넓은 남자 흐물, 채식주의자 시크남 태환, 슈퍼맘 여동생, 전직 군인 아버지, 위층에 이사 온 첫사랑, 동호회에서 만난 민선, 결혼했거나 애인이 있는 여고 동창생들, 그리고 회사 동료들……. 이 소설은 당당한 싱글 커리어 우먼이 그들과 나누는 대한민국 2013년판 실시간 대화록 같다. 눈으로 소설을 읽고 있지만 귀로 들리는 신기한 소설이다. 좋은 소설은 세세한 설명도, 어려운 사유도 필요 없다. 책을 덮고 나면 따뜻한 희망이 남는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_서진(소설가)

《모던 하트》는 모든 것이 세속적 욕망 앞에서 휘발되어 날아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자 그 심연에 대한 보고서다. 헤드헌터인 미연에게 도시는 학벌로 번식하고 스펙으로 증식하는 인간들의 냉혹한 정글과 같다. 이곳에서 사랑과 가족은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지 못한다. 현대인의 내면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불안하고 쓸쓸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모던 하트》는 ‘세속의 심연 또는 핵심’이라고 읽어도 될 것이다. _서희원(문학평론가)

우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살 수 없다(아니,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는다). 집만 해도 그렇다. 소파, 스탠드, 식탁, 침대 커버와 커튼들. 어쩜 저렇게 완벽하게 조화로운지! 내가 사는 집을 한번 둘러보기만 해도 단번에 비교가 된다. 욕실 타일 사이에 낀 곰팡이, 유행 지난 벽지, 식탁 한쪽에 쌓인 각종 영양제들. 드라마는 먹는 걸 자주 보여주지 치우는 걸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 그걸 버리러 갈 때마다 다른 집들의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보아야 한다. 하물며 연애는 더더욱 드라마와 다르다(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드라마처럼 꿈꾸고 싶긴 하다). 일이고, 연애고, 결혼이고…… 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예기치 못한 것이 간섭한다. 그것이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근사해지지 않는다. 그 예기치 못한 놈이 바로 ‘일상’이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지저분한 내 집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느낌이 든다. 무심한 듯 던지는 삐딱한 말들이 가슴에 박힌다. 그건 인물들이 삐딱해서가 아니라, 대사 속에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 번도 세련된 적이 없는 여자인데 스스로 그걸 알까? 그래서 자신이 굉장히 세련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강남역을 향해 가는 여자의 마지막 모습이 더더욱 슬프다. _윤성희(소설가)

《모던 하트》는 무리한 설정이나 과잉 의식 없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착실하게 서사를 쌓아간다. 연애라는 강물이 흘러가면서 주변에 있는 회사, 가정, 사회 등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살려낸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문제적 단면이라고 할 풍경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번엔 다소 좁고 유유한 강이었지만 앞으로는 격랑을 불러오고 범람을 일삼으며 힘차게 흘러가기를 기대해본다. _은희경(소설가)

소설은 시민권을 획득한 이들의 독점물인 아크로폴리스의 언어가 아닌, 이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의 공간인 아고라의 언어다. 소설이 구체적인 삶의 결들을 담아야 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 소설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지금의 삶 ‘너머’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모던 하트》는 세태에 대한 천착으로부터 인간을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헤드헌터’의 시대, 야만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속도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이토록 비루한 현실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소설이다. _장성규(문학평론가)

《모던 하트》는 막스 베버가 경고한 ‘영혼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주의자’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야기다. 누구보다 회사 일에, 그리고 연애에 열정적이지만 그들의 열정의 대상은 ‘그 일과 그 회사’가 아니어도, ‘너’가 아니어도 된다. 고유명사 대신 화려한 ‘브랜드’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열정, 《모던 하트》는 이 현대인이 품은 차가운 플라스틱 ‘하트’에 대한 블랙코미디다. _정은경(문학평론가)


■ 본문에서

집에 돌아와 거실의 불을 켜는데, 거실 등 밑으로 드러난 내 집이 너무나 아늑하고 깔끔해 보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총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있는 세연은 언니에게도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과 사생활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언니의 손을 잡으려 한다. 전쟁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나라로 가버릴 거면서. 남편도, 자식도, 애인도 없는 나는 잠깐의 쓸모 때문에 임시로 고용된 단기 용병. 이 어리숙한 용병은 애국심에 들끓는 다른 나라 병사들의 절절한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만 내일의 휴식을 반납하고 말았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66~67쪽)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출신 대학이 채용 여부의 관건이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출신 대학을 왜 그렇게 따져요? 일만 잘하면 되지. 희한한 사람들이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최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미연 씨가 아직 대한민국을 모르는구나. 대한민국에서 출신 대학은 낙인이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 경력 좋고 대학원 좋은 데 나와봐야 아무 소용 없어. 대학을 좋은 데 나와야지. 학부를 좋은 데 안 나온 사람은 절대 A급이 못 돼. 외국계 회사도 정말 인지도 높은 회사는 사람 뽑을 때 출신 대학 다 따져. Z사 봐. SKY 출신 아니면 아예 이력서도 보내지 말라고 하잖아? 서울대 대학원, 아니 하버드 대학원 나와도 대학 좋은 데 안 나오면 다 꽝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단 회사에 들어간 후에는 회사의 브랜드가 그 사람의 이름값이 된다고 생각했다.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내 생각은 서치펌 일을 하면서 완전히 개조되었다. (100~101쪽)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푸른 등 옆의 세모꼴이 두 개에서 하나로 바뀌더니 이내 붉은 등이 들어왔다.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청회색 하늘 아래 불야성처럼 불을 밝힌 유흥가가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거리 세 면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한 면에만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군집해 있었다. 나는 대각선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쓰러져가는 5층짜리 주공 아파트가 있었던 자리에 L자 세 개가 새겨진 초고층 아파트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회색 구름이 천천히 지나갔다. 유영하는 구름 사이로 우뚝 솟은 아파트를 보고 있으니 중세의 성이 떠올랐다.
중세의 밤. 높다란 성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자고, 사랑하고, 싸우며 당대의 일상을 채워갔을 것이다. 전깃불이나 자동차 따위가 없었을 뿐 사람들의 욕망과 기대는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지금, 저 아파트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희로애락을 부지런히 새기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아파트 옥상의 테두리 조명과 유흥가의 조명이 경쟁하듯 불을 밝히고 있는 이 밤의 풍경을 중세의 괴기스러운 밤이라고 회상할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저 아파트는 L자 세 개가 들어간 국적 불명의 이름보다 ‘산성’이라고 이름 짓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잠실산성. 역사성을 함축하기에도, 이름만 듣고 택시 기사들이 찾아가기에도 훨씬 낫지 않은가. (111~112쪽)

내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럴 때다. 나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생의 동반자와 새끼들을 데리고 와 지지고 볶을 때. 그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새끼들 돌봄’과 ‘친구와의 사교’라는 멀티태스킹을 해내도록 성심으로 도와야 할 때. 정작 나는 관심도, 아는 바도 없는 화제에 대해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때. 아프거나 외로울 때가 아니라 바로 이럴 때! 정말이지 나는 결혼하고 싶다. 아무나 붙잡고 당장에라도 결혼하고 싶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건 얼마나 큰 손해인가. 결혼한 사람들은 싱글인 사람들을 만나면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자유를 존중해주지는 않는다. 자기들이 선택한 삶에 따르는 무거운 짐들을 당연한 듯 나누어 들자고 한다. 그들에게 나란 존재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어서 시간이 넘쳐나는 인간일 뿐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이 현상은 심화된다. 정작 나는 결혼하지도 않았고 자식도 없는데, 점점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돌보거나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늘어난다. (156쪽)

이. 십. 대. 그 단어를 나직이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 내게도 20대가 있었지. 마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육신은 어느새 20대를 훌쩍 뛰어넘어 낯선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른일곱. 아무리 되새겨도 늘 낯선 나이. 3년 뒤면 나는 마흔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흔. 그때 나는 어떤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까. 서치펌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여전히 싱글일까. 지금처럼 흐물 같은 남자나 만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나이 먹기가 두려운 것. 그래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행해온 공고한 관습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것. 차라리 차악을 택해 무시무시한 세월을 덮고 건너가는 것. (206쪽)

나는 태환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만남을 단숨에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 밤의 과음을 후회할 뿐. 태환과 다시 만나고 싶은 건 그 밤의 거친 단면을 조금이라도 다듬고 싶어서다. 이대로 연락이 끊긴다면 그 단면은 영원히 다듬어지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리라.
그를 만나고 싶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천천히 식사를 하고 싶다. 예의를 갖추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면서 정중하게 헤어지고 싶다. 그렇게 내 아픈 단면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지고 싶다. (258쪽)

어차피 생이란 그런 것. 진행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경각심이 든다면 그것은 파국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완전한 격정과 놀라운 속도, 그리고 이전의 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일탈이 혼연일체를 이룰 때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완성된다. 원인과 과정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인연이 이미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것. 생에 같은 순간이 두 번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파국으로 인한 교훈도 실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스스로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후일담이다. (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