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

저자

조우리

브랜드

한겨레출판

분야

한국문학 > 한국단편소설

출간일

2022-02-21

ISBN

9791160407525

가격

14,000원


구입처

전자책

도서정보

“너에게 어떤 말을 주었는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

기억하니까. 그거면 충분해.”

-

답장을 바라지 않는 편지가 실어 나르는 용기와 긍지의 마법,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을 빛낸 단 한 사람의 이야기

 

여성, 퀴어, 노동을 소재로 디저트와 차처럼 달콤쌉싸름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조우리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이어달리기》는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서로를 이모와 조카로 칭하는 중년 레즈비언 ‘성희’와 일곱 명의 여성 이야기다. 성희는 그들의 성장 과정에 보탬이 되는 미션 편지를 보내고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면서,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든든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편지에 담긴 미션을 수행하며,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배우고 공유하는 정서적 공동체를 이룬다. 소설 일곱 편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좋은 어른’이자 ‘좋은 이모’가 되고 싶은 성희의 따뜻한 입김과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성희는 ‘살아서 하는’ 자신의 장례식에 조카들을 초대해 장례식 준비와 진행을 맡기며 마지막 미션을 수행한 그들에게 유산을 나눠 준다. 혈연과 세대를 초월해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선뜻 손을 내밀며 세상의 선의와 연대를 몸소 보여준 그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면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를 알고 내가 아는 어린이들에게, 이미 나와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동료들에게. 나보다 더 어른이 된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의 나보다 덜 어른이었던, 그리고 아이였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성희 이모가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대신 해주었다. _작가의 말에서

 

첫 번째 미션: 폐업 위기에 놓인 가게 ‘엘리제’를 구하라!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인공 혜주는 성희의 친구 수진의 딸로, 인턴으로 근무하던 회사에서 정규직 전환 불가 통보를 받는다. 같은 날 성희의 마지막 미션 편지를 받는데, 미션의 내용은 바로 성희의 추억이 깃든 장소인 ‘엘리제’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의 독후감 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미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각과 당돌함을 습득한 조카로서, 성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머리를 꽁꽁 싸맨다. 혜주는 미션을 성공해 유산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성희는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을까?

 

두 번째 미션: 정성을 다해 유기 거북을 돌보라!

〈고요한 생활〉의 주인공 수영은 어릴 때 성희의 옆집 이웃이었으며 보습학원 국어 강사로 일한다. 외동인 데다 부모가 집을 오래 비우는 바람에 극심한 외로움을 견디는 수영을 위해, 성희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도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언제나 연결되어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었다. 수영은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린이에서, 정이 들기 전에 학원과 집을 주기적으로 옮기는 어른이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거북을 돌보라는 뜬금없는 미션을 받는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성희는 왜 수영을 적임자로 지목했을까? 수영에게 주어진 미션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 번째 미션: 장례식 손님에게 알맞은 커피를 대접하라!

〈둘 둘 셋〉의 주인공 지애는 성희의 애인이었던 주현의 진짜 조카다. 셋이서 놀이공원을 갔다 온 이후로 성희에게 미션 편지를 통해 “펜팔을 가장한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성희 덕분에 “어린 시절에 만난 어른이 보여준 태도가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지애는 카페를 운영하며 어린이 손님을 존중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열세 살 생일이 지나고 성희가 데려간 음악다방에서, 취향을 가진 어엿한 손님으로 대접받은 경험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지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곁에는 어떤 어른이 있었는지, 나는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네 번째 미션: 장례식에서 성희 이모를 보고 웃어라!

〈쿠키가 두 개일 때〉의 주인공 예리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의 딸로, 이웃 피자집에서 일하던 성희와 어울려 새우 피자에 담긴 사랑을 듬뿍듬뿍 받으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피자집이 문을 닫고 성희는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졌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아기자기한 미션 편지로 줄기차게 이어졌다. 성희의 마지막 미션 편지는, 예리가 영사산업기사 자격증을 딴 뒤 첫 영사실 근무를 마친 날 도착한다. 오랜만에 보는 이모를 반가워하며 웃어달라니…… 예리는 참 실없는 미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성희의 장례식에서 최선을 다해 배우처럼 웃음 연기를 해야 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유년에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준 존재의 죽음 앞에서 예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섯 번째 미션: 성희의 장례식 사회를 맡아라!

〈구르는 재주〉의 주인공 태리는 P그룹 빌딩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며 프로 작사가를 꿈꾸지만, 가사가 채택되지 않아 낙방을 거듭하는 인물이다. 성희는 태리 엄마의 직장 동료였고 초등학교 체육 시간의 앞구르기 시험을 준비하는 태리에게 끈기와 용기를 심어줬다. 태리가 999번째, 1000번째 낙방에도 이를 악물고 계속 작사에 도전하는 모습에서, “넘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 넘어”지고 결국 시험을 통과한 어린 태리가 보인다. 성희는 태리의 돌잔치에서 자신이 사회를 봤듯, 태리에게 장례식 사회를 부탁한다. 혈연이 아닌 애정으로 이어진 조카와 이모의 삶과 죽음이 아름다운 마법처럼 맞물리는 작품.

 

여섯 번째 미션: 중학생 서퍼인 지민의 하와이 여행에 동행하라!

〈파도가 온다〉의 주인공 소정은 6년 차 교양국 소속 방송 피디다. 새엄마의 동생인 성희를 따라 다른 조카들과 스키장에 간 경험을 계기로, 청소년 스키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성희의 미션으로 지민의 해외여행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되면서, 큰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의 병실을 매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성희였다. 그의 정성 어린 응원과 지지로 소정은 방송 피디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 것이다. 성희에게 난관을 헤쳐가는 힘을 배웠듯, 소정은 지민이 서핑 대회에 참가해 자신만의 파도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도움받던 사람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돕게 되는 순간이 하와이의 해변처럼 눈부시게 펼쳐진다.

 

일곱 번째 미션: 배턴 터치에 성공하라!

〈배턴 터치〉의 주인공 아름은 몸이 약해 소아병동에 입원했을 때 옆자리의 보호자인 성희를 만났다. 성희는 아름이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얘기를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아름은 다른 조카들과 달리, 배턴을 받기만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건네보라는 똑같은 미션을 계속 받았고 그때마다 ‘배턴 터치’를 하지 못했다. 그는 학교에선 친구들이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는 대상이었으며, 직장에선 동료의 푸념을 잠자코 들어주는 ‘인간 대나무숲’일 뿐이다. 마지막 미션으로 또다시 ‘배턴 터치’를 해야 하는 아름은 이번엔 미션에 성공할 수 있을까? 미션의 보상으로 무엇을 받게 될까?

조우리
소설가. 2012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여성, 퀴어,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쓴다. 경장편소설 《라스트 러브》, 소설집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팀플레이》를 냈으며, 공저로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 《언니밖에 없네》 《엄마에 대하여》 등이 있다.
엘리제를 위하여
고요한 생활
둘 둘 셋
쿠키가 두 개일 때
구르는 재주
파도가 온다
배턴 터치
에필로그 - 답장은 없어도 괜찮아
작가의 말
■ 추천사
실패를 먼저 배운 사람들에게 성공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바라는 것의 목록으로만 가득한 세계는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우리의 소설에는 자신만의 파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 위에 올라타는 용기를 보여준다. 예측하지 못한 곳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내 손을 잡아준다. 누군가에게 실패의 무게를 떠넘기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무언가를 한없이 받아안기만 했던 당신에게 그런 무게는 이제 그만 감당해도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타인이 얹어놓은 무거운 편견 때문에 똑바로 구를 수 없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가볍게 제대로 굴러보라고 격려하고, 짐을 치워주는 이들을 만날 것이다. 이어달리기의 배턴을 들고 달려오는 당신을 기다려준다. 여기 파도가 있다. 올라설 자유를 가진 당신과 함께. _김지은(문학평론가)


■ 본문에서
그날, 성희는 알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연인이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리라고는. 그다음 해에는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 수진이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 뒤로 어울리던 친구들이 모두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리라고는. 배신감에 다시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통통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조카들은 거부할 수 없이 귀여웠다. _14~15쪽

편지는 혜주를 포함해, 성희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서로를 이모와 조카로 칭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곱 명의 소녀들에게 전달되었다. 첫 번째 미션은 모두가 성공했고, 그 보상으로 그해 겨울에 다 같이 스키장에 갔었다. 성희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가는 길은 미리부터 챙겨 입은 두툼한 옷 속으로 땀을 흘리면서도 즐거웠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은 통감자 구이와 핫도그의 따끈하고 짭짤한 맛은 아직도 생생했다. _20~21쪽

수진이 제 딸에게 그렇게 성희를 소개했을 때, 성희는 혜주에게 좋은 이모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그 결심을 지키면서 살아온 것 같은데, 모쪼록 혜주도 그렇게 생각하길. 나중에 성희를 추억하면서, 그 이모 진짜 좋았는데, 그런 말을 해주길. 다른 조카들도 함께라면 더 좋을 것이다. 서로가 기억하는 성희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을 수 있다면. _34쪽

어느 날 열 살의 수영에게 보라색 편지 봉투가 도착한다. 수영이 태어나기 전부터 수영의 옆집에 살았던, 수영의 엄마가 언니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영에게는 이모가 된, 이제는 먼 곳으로 이사 간 성희 이모로부터.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언제나 연결되어 있을 거야.” 가까운 사람과의 첫 번째 이별 앞에서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는 법을 알지 못하는 열 살짜리에게 했던 그 말이 그저 울음을 달래기 위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모의 편지는 끊어지지 않았고, 수영의 유년기를 빛내주는 기억들로 이끌었다. _52~53쪽

성희는 1인실 침대의 머리맡에 작은 사막에서 수영과 거북이 함께 찍은 사진을 담은 액자를 놓아두었다. 기나긴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둘의 모습. 거북에게 빨간 풍선을 매 어주던 날, 성희는 거북에게도 미션을 주었다. 수영이를 부탁해. 오래오래 같이 살아줘. 변함없이, 고요하게. _74~75쪽

왜 어떤 어른은 어린이를 만나면 꼭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을까.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이가 아니라 미래에 어른이 될 존재하고만 대화하겠다는 것처럼. 차라리 어젯밤에 꾼 꿈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왜 재미없는 어른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_85쪽

어린 시절에 만난 어떤 어른이 보여준 태도가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_95쪽

넘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 넘어져봤으니까, 어떻게 하면 넘어지는지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넘어지는 길을 피해서 데구루루 굴러서 착, 성공할 거라고. 성희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할수록 태리는 울고 싶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럼 어떡해? _139쪽

태리는 돌잡이에서 한 손으로는 실을, 다른 손으로는 돌잡이 물건들이 올라간 쟁반을 들고 있던 성희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가늘고 긴 걸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성희는 두고두고 태리에게 말하곤 했다. 보라고, 네가 이모를 직접 선택했다고. _148쪽

“원 웨이브, 원 서퍼. 한 파도에 한 사람만 타는 거예요.” 지민이 손을 뻗어 레스토랑 창밖의 해변을 가리켰다. 노을이 지는 바다 위로 서퍼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나란히 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저마다 각자의 파도를 타고 있는 거라고. 모두가 다른 물결이라고. 같은 바다에서도 같은 파도를 타는 게 아니라고. 파도는 혼자 타는 거라고. _171쪽

아름은 성희의 미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건네받은 배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상상을 했다. 무거웠던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제 몫의 배턴 하나만 들고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상상. 그런데 누구에게 배턴을 준단 말인가. 아주 적은 무게라도 아무에게나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준비가 된 같은 팀에게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름은 알지 못했다. 기꺼이 아름을 이어 달려줄, 등을 내보이고 손을 뒤로 뻗은 채 발을 맞춰줄 사람을. 그 준비된 자세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 정말 알아볼 수는 있는 걸까? _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