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평전

저자

신병주

브랜드

한겨레출판

분야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출간일

2021-01-25

ISBN

9791160404548

가격

18,000원


구입처

전자책

도서정보

시대에는 졌지만 역사를 앞서나가다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의 시대였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의 기치를 들고 건국됐지만, 세조의 왕위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이 보여주듯 실제로는 성리학의 이상이 작동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하며 성리학적 질서의 실현을 주장했던 사림파가 도리어 화를 당했던 것이 바로 사화였다. 특히 연산군은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일삼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거 숙청했다.

폭군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고,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 시대적 요구로 떠오른 상황에서 조광조가 역사 속에 등장했다. 그는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자기 생애의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혁파하고, 『소학』과 향약을 보급해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했으며, 현량과를 실시해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을 정계로 불러들였다.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겨냥한 정국공신 개정과 위훈삭제는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의 정점이었다.

조광조의 개혁을 두려워했던 훈구파와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했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사화의 시대에 성리학적 이상을 꿈꿨던 미완의 개혁가, 조광조의 삶을 살펴보자.

신병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석사, 박사).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2021년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KBS1 TV에서 <역사저널 그날>을, KBS1 라디오에서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연산군과 광해군, 왕과 아들, 전염병 편에 출연하였다. 문화재재단 이사, 궁능활용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2018년에는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최고 베스트 강사상을 받았다.
■ 차례

발간의 글|‘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정출헌・5
들어가는 말|조광조의 개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9

1장 사화(士禍)의 시대에 태어나다
1. 무오사화, 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충돌 17
2. 갑자사화, 폐비 윤씨의 죽음과 그 후폭풍 25
3.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 35

2장 역사 속에 등장하다
1. 평생의 스승, 김굉필과의 만남 45
2.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다 60

3장 성리학적 개혁을 꿈꾸며 비상하다
1. 경연, 왕을 철인(哲人)으로 만들기 91
2. 소격서 혁파, 왕도정치의 첫걸음 102
3. 『소학』과 향약 보급,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 111
4. 현량과 실시, 개혁의 후원군을 얻다 116

4장 기묘사화, 개혁의 정점에서 추락하다
1. 개혁의 완성, 정국공신 개정 127
2. 11월 15일 밤, 중종의 역습 135
3. 조광조를 둘러싼 공방 140
4. 중종의 진심 144
5. 뜨거웠던 감자, 현량과의 폐지 157
6. 조광조, 개혁가의 최후 163

5장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기억되다
1. 중종, 조광조를 끝까지 부정하다 169
2. 인종, 조광조를 복권시키다 177
3. 선조 대, 유생들의 문묘 종사 청원 180
4. 광해군 대, 문묘에 종사되다 184
5. 사림파의 영수들, 조광조를 기억하다 187
6. 정조, 조광조를 존숭(尊崇)하다 190

6장 성리학적 이상을 함께 꿈꾼 사람들
1. 기록으로 부활한 기묘사림 195
2. 기묘팔현, 조광조와 함께한 사람들 201

7장 조광조를 기억하는 서원들
1. 심곡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 살아남다 218
2. 죽수서원, 육신이 죽은 곳에서 부활한 정신 221
3. 도봉서원, 당쟁의 중심에 서다 223

맺음말 | 중종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 231
주석 238
주요 저술 및 참고문헌 244
이미지 출처 246
연보 248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현량과 합격자 28인 251
찾아보기 261
최고의 조선시대 전문가, <역사저널 그날>의 신병주 교수가 들려주는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 조광조 이야기

조광조(1482~1519)는 조선시대, 나아가 한국 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개혁가다. 조광조는 가슴에 성리학적 이상을 품고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인생을 바쳤으나, 그의 이상은 당대 조선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꿈이었다. 조광조의 이상은 결국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됐지만, 역사는 그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역사저널 그날>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최고의 조선시대 전문가, 신병주 건국대학교 교수는 이 책에서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짚는다.

조광조가 태어난 15세기 후반은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성종 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훈구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고 오히려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사건인 사화가 발생했다. 특히 연산군은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일삼으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면 죽은 사람까지 부관참시할 정도로 가혹했던 연산군의 폭정은 큰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중종은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사화의 시대’에 성장한 조광조 또한 성리학 이념으로 완전 무장한 채 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광조,
성리학적 이상을 꿈꾸며 비상하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 길에 올랐던 사림파의 핵심 인물,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갈고닦았다. 학문에 전념하던 그는 29세인 1510년(중종 5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고, 34세가 된 1515년(중종 10년)에는 알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다.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를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이라는 조광조의 대책문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에 발탁됐다.

3개월 후, 조광조가 언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됐을 때 폐비 신씨의 복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중종반정 일주일 만에 폐위되어 쫓겨났는데, 1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폐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훈구파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오히려 상소를 올린 두 사람이 유배 길에 올랐다. 이때, 언관직에 제수된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조광조는 김정과 박상을 유배 길에 오르게 만든 대간들의 전원 파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몇 달에 걸친 논쟁 끝에 대간들이 전원 교체됐고, 조광조는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이렇듯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등장한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에 나섰다.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만 제대로 된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연을 활성화했고,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 혁파에 나섰다. 『소학』과 향약을 보급해 조선 사회 곳곳에 두루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 했고, 지방 사회를 중심으로 은거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일종의 천거 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했다.

개혁의 정점은 정국공신 개정이었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정국공신에 책봉된 사람 가운데는 공이 없는데도 인맥으로 공신이 된 인물이 많았다. 조광조는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내고 이(利)를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으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지게 하려면 먼저 이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면서 정국공신으로 책봉된 사람 중 공이 없는 이들의 훈작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자신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정국공신 개정에 반대했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신하들의 뜻에 밀려 마침내 정국공신 120명 가운데 무려 2/3에 달하는 76명을 공신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중종의 변심과 훈구파의 반격
조광조, 개혁의 정점에서 추락하다

하지만 중종이 정국공신 개정을 선언한 지 불과 4일 뒤인 11월 15일, 상황이 반전됐다. 중종은 갑작스레 조광조 세력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붕당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들만 요직을 차지했다는 명목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 성균관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펼치며 조광조의 죽음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중종은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중종은 그렇게 한때 최고의 파트너였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그를 제거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하나로 꼽히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국공신 개정, 현량과 실시 등 조광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번복하며 개혁의 흔적을 지우는 일도 진행됐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 일파가 널리 보급했던 성리학 이념서 『소학』과 『근사록』이 잘 읽히지 않을 정도로 기묘사화의 정치적・사상적 파급 효과와 후유증은 컸다.

하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실패한 개혁가로만 놔두지 않았다. 조광조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를 인정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났다. 홍문관 부제학 송세형, 성균관 유생 신백령 등 수많은 사람이 조광조의 복권을 요청했고, 마침내 조광조가 사망한 지 26년 만인 1545년(인종 1년)에 인종의 유언으로 조광조는 복권됐다. 광해군 대에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면서 조선 최고의 유학자 반열에 올랐다. “지금 성리학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광조의 힘인 것이다”라던 이이, “조광조의 부음을 듣고 사로(仕路, 벼슬길)의 험난함을 알았다”라며 낙향했던 조식 등 사림파의 영수들 또한 조광조를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로 숭상했다.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
조광조의 개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역사의 승리자로 남은 조광조가 정작 당대에는 패배한 이유가 뭘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의 한계다. 조광조는 왕이 성리학 이념 위에 군림할 때 연산군의 폭정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경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왕을 견제하려 했다. 성리학이라는 견제 장치를 통해 군주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이었다. 중종이 한때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를 제거한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라는 구도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림파와 갈등하던 훈구파도 중종에게 힘을 보태면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대, 보수와 개혁 사이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였다.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결국 조광조는 미완의 개혁가로 남았다.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요즈음,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