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 광기의 일기

저자

백민석

브랜드

한겨레출판

분야

한국소설

출간일

2017-12-04

ISBN

9791160401066 03810

가격

12,000원


구입처

전자책

도서정보

‘작가들의 작가’, ‘우리 시대 압도적 하드코어’

소설가 백민석의 신작 장편소설!

‘작가들의 작가’, ‘우리 시대 압도적 하드코어’ 소설가 백민석의 신작 장편 《교양과 광기의 일기》가 출간되었다. 제목부터 독특한 이 소설은 40대 소설가인 ‘나’가 쓰는 ‘교양’의 일기와 광기 어린 한 10대 소년이 쓰는 ‘광기’의 일기가 일기장 앞뒷면에 번갈아 쓰인다는 구성의 환상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87일간의, 180개의 일기로 되어 있다.

‘어느 날, 나의 일기 뒷면에서 아무도 모르게 광기에 찬 한 소년의 일기가 시작된다’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이중성을 파고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교양성’과 무법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충동적인 ‘이중성’ 중 늘 어느 한쪽만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비록 중심에선 밀려났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걸 소설로서 증명하려 한다. 작가가 직접 찍은 소설 안의 쿠바 사진과 중심에 대한 여러 사상가의 말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앞면에 일기를 쓰는 40대 중년 소설가 ‘나’와

뒷면에 일기를 쓰는 광기 어린 한 10대 ‘소년’의 이야기

소설가 백민석이 오랜 절필을 끝내고 돌아온 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그의 절필로 한국문학은 어떤 ‘전조’를 십 년간 잃었다”는 평론가 황현경의 말처럼, 백민석은 그 전조를 직접 찾으려는 듯 그사이 정말 쉬지 않고 썼다. 소설로는《혀끝의 남자》, 《공포의 세기》, 《수림》을 새로 써서 냈고,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과 《죽은 올빼미 농장》, 《목화밭 엽기전》을 다시 펴냈고, 그사이 미술 에세이 《리플릿》과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절필을 했는지’, ‘왜 돌아왔는지’라는 물음은 아직도 책을 낼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백민석 작가의 신작 장편 《교양과 광기의 일기》의 한 문장을 통해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그녀에 대한 글을 써라. 어떤 도시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 도시에 대한 글을 써라. 이것이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이 나라, 이 도시에 대해 사나흘 고심해 글을 쓴 일이, 지난 한 달 관광객으로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긴 애정보다 더 많은 애정을 갖게 했다.

글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해를 더해, 사랑을 더 깊게 한다. 글은 애정에 애정의 이유를 더해, 애정을 더 깊게 한다. 나도 내가 사랑에 대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_87쪽

 

‘나도 내가 사랑에 대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하지만 백민석이 써온 소설들은 모두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싶어서 쓰였다. 절필한 것도, 돌아온 것도, 계속 소설을 쓰는 것도 역시 그렇다. 절필 전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자기 고백적 성격이 짙었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백민석은 여전히 자신과 세상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이해와 사랑과 애정을 더해 글을 쓰는 작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자신이 본 걸 정직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쓰는 작가. 그 점에서 《교양과 광기의 일기》는 그의 새로운 대표작임이 틀림없다. ‘교양’과 ‘광기’와 ‘사랑’의 일기임이 틀림없다.

 

겹쳐지고 충돌하고 이어지는

두 개의 일기, 그리고 두 개의 이야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는 얼핏 보면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번갈아 쓰이는 일기라는 형식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부터 난감하게 만든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쿠바 여행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가를 연상시키는 40대 남자 소설가인 ‘나’는 일본을 거쳐 쿠바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순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첫날, ‘나’의 안에서 한 ‘소년’이 깨어난다. 전쟁놀이와 광란의 섹스를 좋아하는 10대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나’의 일기장 뒷면에 또 하나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남자의 일기가 ‘교양’의 일기라면 소년의 일기는 ‘광기’의 일기다.

그날부터 둘은 같은 여행을 하며 각기 다른 것들을 보고 상반된 두 개의 일기를 써나간다. 도쿄에서 ‘나’가 도쿄의 지하철에 몰두할 때, ‘소년’은 일본의 사무라이와 칼에 심취한다.

쿠바에서도 마찬가지다.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 ‘나’가 숙소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산책을 하면서 쿠반 샌드위치를 사 먹고, 돈을 환전하고, 쿠바 일정을 도와줄 코디네이터 리자를 만나는 동안, ‘소년’의 세계에선 ‘햄’과 ‘게바라’와 ‘루벤’이 도미노 게임을 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쿠바에서의 ‘나’의 일상은 한국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한국에서와 똑같은 환경으로 작은 방의 책상을 꾸미는 게 고작이다. 제일 골칫거리라고 하면 인터넷 정도일까. 그동안 ‘소년’은 숙소 맞은편 레스토랑에서 재즈 뮤지션들의 노래를 듣는다.

‘나’가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아바나를 산책하고, 미국 대사관과 여러 사상가가 말한 중심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소년’은 말레콘의 보이지 않는 낚시꾼들의 세계와 조우한다. ‘나’가 아바나 관광 지도를 보며 카피톨리오를 가운데 놓고 산책하고, 아바나 비에하의 ‘카사’라는 주택 형태를 보고 감탄하는 동안, ‘소년’은 허벅다리 안쪽에 ‘명산(名山)’이란 문신을 한 물라토 여자 ‘다나이스’를 만난다. 그리고 이 ‘다나이스’와 몸을 파는 ‘룰리의 숙녀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편, ‘나’의 일기장에선 단 한 번도 ‘다나이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교양’의 일기에선 말레콘의 보이지 않는 낚시꾼은 등장할 수 없다. ‘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큰일이라는 건 인터넷을 하기 위해 나우타 카드를 구매해 와이파이존에 가거나, 비에 젖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절망에 빠지거나, 새 카메라를 사기 위해 아바나를 정처 없이 헤매거나, 호세 마르티 문화원 측으로부터 강연 원고를 퇴짜 맞는 것 정도다. 반면, ‘소년’의 세계는 다르다. ‘소년’은 ‘룰리의 숙녀들’의 백인 마스터를 폭행하고, ‘다나이스’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애쓰며, ‘나’와 같이 아바나를 떠나지 않으려고, ‘나’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저항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세계는 점점 좁혀지고, 겹쳐지고, 충돌한다. ‘소년’이 폭행했던 ‘룰리의 숙녀들’의 백인 마스터는 결국 “지난 10월부터 나타났고, 물 빠진 카고 반바지에 얼굴이 시커멓게 탄” 치노인 ‘나’를 알아본다. 호텔 내셔널의 연말 갈라쇼를 보던 ‘나’의 눈에도 ‘다나이스’가 보인다.

‘나’의 쿠바에서의 일정이 끝나가면서 이야기도 점점 끝으로 치닫는다. ‘소년’은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소년’의 광기의 세계와 마주하고도 무사할까? ‘다나이스’는 아버지를 찾게 될까? ‘나’와 ‘다나이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표지만 본 독자들은 영영 모를 것이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중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상가들이 말해왔다. 이 소설은 그 말들에, 내 말을 덧붙이는 식으로 쓰였다. 중심은 세상에 질서를 가져와 세상을 더 살 만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중심에서 밀려난 많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_작가의 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 ‘나’는 뭐고 ‘소년’은 뭐고 ‘다나이스’는 뭐고 ‘백인 마스터’는 뭐고 ‘다나이스의 러시아인 아버지’는 뭐고 ‘보이지 않는 낚시꾼들’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왜 일기는 꼭 앞뒷면에 쓰여야 했을까? 중심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래도록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었고, 자라면서 늘 그 중심에 대해서 들어왔다. 발단, 전개, 절정, 위기, 결말이라는 이야기의 형식과 중심 소재와 줄거리와 주제라는 이야기의 중심과 여러 시제와 인칭과 비유법들에 대해서. 중심이 있는 이야기는 소설의 세계에 질서를 가져와 소설을 더 살 만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소설의 중심에서 벗어난 많은 소설을 비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소설 읽을 시간도 없다”는 소리들 틈에서 생겨난 건지도 모르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중심에 맞게 써서 책으로 내려는 소설들 틈에서 생겨난 건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가 왜 여전히 백민석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교양과 광기의 일기》의 표지만 본 독자들은 영영 모를 것이다.

 

백민석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소설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러셔》,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이 있다.
9월 28일
(…)
12월 23일
작가의 말
그녀가 샤워하는 동안, 남편은 이제 아이를 묶어 지하 작업실로 내려보낼 것이다. 거기 어두컴컴한 바닥에 하루 이틀쯤 혼자 버려둘 것이다. 그래야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해질 테니까. 어쩌면 과도한 전기쇼크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들어 내일 새벽쯤 숨을 멈추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남편은 아이를, 잔디밭의 거름으로 쓸 것이다. 내년 봄이 되면, 아이를 거름 준 자리의 흙은 새카맣게 젖어 들고, 잔디들은 주위 어느 것들보다 더 파릇파릇 생기를 띨 것이다. _108쪽

증세가 나빠지려 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징후는, 꿈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꿈이란 누구나 꾸는 것이며 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두려운 것은, 잠잘 때 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이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정신과의 대기실에서 말이다. _112쪽

어째서 치를 떨게 되는지, 박태자는 알지 못했다. 점잖지 못한 우아하지 못한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고무공처럼 튀었다. 그러곤 치를 떤다는, 순간적인 신체적인 증후로 나타났다. 남편이 지하 작업실에서 만지작거리고 있을 아이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남편의 눈물이, 아이가 불쌍해서 나오는 게 아닌 것처럼. 아마도, 아이를 꾀어내어 차에 태워 기절시키고 뒤뜰에 팽개친다는 그 격렬한 행위와 관련 있을 것이었다. 흔치 않은 그 격렬함의 순간이 해소된 후에, 느닷없이 밀려드는 어떤 감정과 관련 있을 것이었다. _108~109쪽

“하. 그래서 그 쫓겨난 나쁜 냄새들이란 것들이 숨어버렸답니다. 똘똘 뭉쳐서, 증류하고 난 다음 비커 밑바닥에 고인, 무슨 끈적끈적한 진액처럼.” 그는 그 쫓겨난 나쁜 냄새들의 엑기스, 진액들이 언젠간 이 과천의 위생 처리된 맨홀 뚜껑 바깥으로 넘쳐날 순간이 올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마, 긴장을 놓지 마. _183쪽

“……목화밭이 뭘 먹고 크는지 알아?” 남편이 한 발짝 한 발짝 차분한 걸음을 옮기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 수수께끼를 내는 거야, 수수께끼…… 목화밭이 뭐로 기름져가는지 알아? ……목화밭이 해마다 그토록 기름져가는 이유를 알아? ……뭘 먹길래!” _224~225쪽

따지고 보면 그와 아내가 이 사회에 끼친 해악이란 엄밀히 말해,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는, 제아무리 용을 써도 사회 체계 안의 내용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괴물스러운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물은 장난감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잠들어 있던 괴물을 억지로 깨워 불러들여놓곤, 재미로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종국엔 괴물이 왔던 곳, 사회 체계의 바깥으로 다시 쫓아 보내는 악취미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바로 그처럼. 오장근과 펫숍에게 양수겸장을 당한 그처럼. 제이슨도 프레디도 그렇게 놀림감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저질러놓은 것이라곤 예쁘장한 사내아이 몇을 죽여 둔덕에 파묻은 것뿐이었다. 그저 그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죄악도 패악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_299쪽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둔덕 전체를 일별했다. 거기 목화밭이 있었다. 잔디밭은 간데없고, 이번엔 목화밭이 있었다. 초여름 햇볕이 쨍, 쨍, 날카롭게 울리며 목화밭에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여기가 목화밭인가? 씨는 아직 뿌리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 목화밭인가? 그는 볼 수도 없었다. 둔덕 전체에 모자이크 처리가 돼 있었다. 둔덕 가득, 까맣거나 진초록인 사각형 반점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는 목화밭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그는 삽을 놓고,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린 다음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입속에 비닐 빵 봉지를 쑤셔 넣은 것 같았다. _309쪽